switch to english
차례
  1. 인터넷과 표현의 자유 - 제이크 베이커 사건
    <시민과 변호사>, 1998년 4월호
  2. 인터넷 보안 - 해커와의 전쟁
    <시민과 변호사>, 1998년 5월호
  3. 에로티시즘과 포르노 - 규제와 자율의 갈림길에서
    <시민과 변호사>, 1998년 6월호
  4. 컴퓨터와 한글 - 우리말 살리기
    <시민과 변호사>, 1998년 7월호
  5. 인터넷 카메라 - 보여주고 싶어요
    <시민과 변호사>, 1998년 8월호
  6. 컴퓨터와 2000년 문제 - 세상 끝날?
    <시민과 변호사>, 1998년 9월호
  7. 인터넷과 한글 - 영어 모르면 문맹?
    <시민과 변호사>, 1998년 10월호
  8. 인터넷형 "번지내 투입" - 전자우편과 스팸
    <시민과 변호사>, 1998년 12월호
  9. 긴급진단 - 밀레니엄 버그
    <시민과 변호사>, 1999년 1월호
  10. 인터넷 주소 투기 - 앉으면 주인?
    <시민과 변호사>, 1999년 2월호
  11. 인터넷과 전자상거래 - 무일푼으로 사는 세상
    <시민과 변호사>, 1999년 3월호
컴퓨터와 한글
우리말 살리기
<시민과 변호사>, 1998년 7월호
이 글에서 [한/글]은 한글과 컴퓨터사에서 개발한 소프트웨어인 세칭 "아래아 한글"을 나타냅니다. 윈도우즈에서는 아래아 자를 올바로 나타낼 수 없기 떄문에 이와 같이 표기할 수밖에 없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글]이라는 소프트웨어로 국내외 사용자들의 사랑을 받던 한글과 컴퓨터(한컴)사가 지난 6월 15일 마이크로소프트(MS)사로부터 1천 내지 2천만 달러의 투자를 수용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돌렸다. 투자 조건은 지난 10년간 국내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주도해 오던 [한/글]에 대한 투자를 한컴사가 중단하는 것이었다. 이는 [한/글]이 세상에서 사라짐을 의미한다.
     [한/글]이 대학생 몇 명의 노력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을 때 컴퓨터를 쓰는 사람들은 우리 청년의 우수한 두뇌에 자부심을 느끼고 "우리도 이런 것을 만들 수 있구나"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까지 우리는 일본에서 만든 값비싼 워드프로세서 전용 기계를 쓰거나, 아니면 타자기 혹은 삼보컴퓨터 사에서 만든 [보석글]이라는 것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보석글]은 소위 "한글카드"라는 부품을 컴퓨터 내에 따로 설치해야 사용할 수 있었고, 프린터에도 한글 글꼴이 설치되어 있어야 했다. 일본에서 만든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든 만큼 사용에 무리가 있었을 뿐 아니라 가격도 웬만한 컴퓨터보다 비쌌다. 이런 상황에서 컴퓨터에 한글카드가 없어도, 프린터에 한글 글꼴이 없어도 우리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한 [한/글]이 나타난 것은 컴퓨터에 우리말이라는 날개를 달아준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만큼 이 [한/글] 개발 포기 발표는 필자뿐 아니라 우리말을 아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한컴측에서는 경영사정이 이처럼 악화된 원인을 소프트웨어 불법복제와 외환위기로 인한 전반적인 경기침체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한컴사에서 [한/글] 개발 포기를 선언하기 얼마 전인 6월 9일자 <한국일보> 25면(경제)에는 정보통신부 장관 배순훈씨의 말을 인용한 기사가 실렸다. "국내 기업이 MS사와 경쟁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이기 때문에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MS사의 운영체계(OS)를 따라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발언이었다. 운영체계(Operating System)라는 것은 컴퓨터가 동작하기 위한 기본 소프트웨어를 말하는데, 배 장관이 말한 'MS사의 운영체계'란 MS사의 윈도우즈 제품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배 장관의 이 발언은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의 현황뿐 아니라 윈도우즈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드러내 준 셈으로, 일국의 장관이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배 장관의 이러한 발언은 MS사에서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에 1천억 원어치의 소프트웨어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의한 것과 관련한 것이었으니만큼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의 반발도 거셌으며, 나우누리와 하이텔, 천리안 등 국내 대형 PC통신망에서도 사용자들로부터 비난 여론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한글
훈민정음 서문에서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든 계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는 달라 한자와 서로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글을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뜻을 쉽사리 펼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내가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이는 사람들이 쉽게 익혀 나날이 쓰기에 편하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취지, 즉 백성을 사랑하는 인본주의와 말과 글을 일치시키는 표음문자가 한글 창제에 밑바탕으로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글에는 우리 민족의 과학과 철학이 들어있다. 한글은 조합을 기본원리로 한다. 발음할 때의 입 모양을 본떠 만든 14개의 자음과, 하늘(ㆍ), 땅(ㅡ), 사람(ㅣ)이라는 삼재(三才)를 바탕으로 만든 10개의 모음을 조합하여 음절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본주의, 음양오행의 원리, 과학 등이 모조리 담겨 있는 언어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만의 자랑이다. 한글은 또 익히기가 쉬워 문맹률 0%라는 기록을 지니고 있다. 이 역시 오로지 우리 민족만이 지니고 있는 기록이다. 실제로 어린이도 세 살이 되기 전에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칠 수 있는데, 이는 영어나 한자 등 다른 언어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기 때문에 처음 듣는 낱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듣는다 하더라도 쉽게 적을 수 있다. 하지만 영어 같은 경우에는 일일이 철자를 불러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컴퓨터속 한글 셋방살이
한글에서 한 개의 글자는 한 가지로만 발음된다. 발음기호가 필요치 않다. 이에 반해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표기와 발음이 서로 다른 것이 많아 지리멸렬할 정도이다. 어원이 서로 다른 것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영어에 많이 편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영어는 표음문자이면서도 발음기호를 필요로 한다.
     영어의 이런 특징은 컴퓨터에서 불리한 점이 많다. 주로 음성인식 부분에서 가장 불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컴퓨터는 장차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인데, 영어처럼 발음과 표기가 일정치 않으면 컴퓨터가 사람의 음성명령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컴퓨터는 영어 발음을 수록한 방대한 양의 사전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 같은 낱말을 두고도 사람마다 발음이 다른 경우도 많아서 문제가 더욱 커진다. 예를 들어 tomato라는 낱말은 사람에 따라 "토마토"라 하기도 하고 "토메이토"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용자가 컴퓨터에게 "캐서린 러프의 주소를 인쇄하라(Print out Katherin Rough's address)" 하고 명령을 내리면 컴퓨터는 인쇄하기 전에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캐서린과 러프의 철자를 말씀해 주십시오(Spell Catherine and Ruff, please)."
     그러나 한글은 컴퓨터에서 한글 자모의 음가(音價)만 보관하고 있으면 된다. 컴퓨터가 사람의 명령을 듣고 그것을 한글 자모로 분리하면 곧바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컴퓨터라는 선진기술을 밖으로부터 들여와 쓰고 있는 형편이고 컴퓨터는 영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결국 영어에 한글을 얹어 쓰는, '셋방살이' 신세에 머물러 있다. 한글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내는 컴퓨터가 빨리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업계뿐이다. 이런 점에서도 배 장관의 발언은 셋방살이 살림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이, 집 주인이 집을 뜯어고칠 때마다 거기에 적응해서 살자는 뜻으로밖에 볼 수 없다. '내집마련'에는 뜻이 없는 것이다. 언제나 MS사의 윈도우즈에 따라가기만 하는 꼴이면 한글은 컴퓨터에서 영영 셋방살이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윈도우즈와 한글
그런데 윈도우즈에서 쓰는 한글은 엄밀히 말해 한글이 아니다. 한자나 일어, 또는 그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림을 한글처럼 보이도록 그려놓았을 뿐인 것이다. 이는 현대 한글에서 사용빈도가 높은 글자(음절) 2,350자를 그림으로 그려놓고, 일정한 방식으로 입력하면 해당 그림이 나타나게 해 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윈도우즈에서 "가"와 "각"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개의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각"이라는 그림은 "가" 다음에 배치된 그림일 뿐이다.
     그러나 한글의 창제원리인 조합방식에 따르면 이 두 글자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각"은 "가"에 받침 "ㄱ"이 붙은 글자이다. 모양뿐 아니라 맞춤법, 발음 등 모든 면에서 서로 관계가 있다.
     이렇게 "가"와 "각" 사이의 관련을 컴퓨터상에서 살려주는 방식을 "조합형 한글"이라 부른다. 이 방식은 1992년에 국내 표준으로 채택되었다. 이에 반해 윈도우즈에서 쓰이는 한글은 "완성형 한글"이라 부른다. 완성형이 표준으로 채택된 것은 조합형보다 빠른 1987년이다. 조합형은 완성형보다 먼저 쓰이기 시작했는데, 어인 일인지 표준으로 채택된 것은 완성형이 먼저이다.
     완성형 한글이 표준으로 채택된 계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글 역사에서는 일제 침략 이후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현대 한글에서 24개의 자모로 조합하여 쓸 수 있는 글자는 모두 11,172글자로서, 조합형 한글에서는 이를 모두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팔다리와 머리를 모조리 잘라내고 20% 정도에 지나지 않는 2,350글자만 남긴 완성형 한글이 표준으로 채택된 데에는 어쩌면 로비라든가 무지라든가 하는 말못할 사정이 있지 않았나 싶다. 완성형 한글은 한글의 본질을 죽이는, 애초에 생겨나지 말았어야 할 기괴한 방식인 것이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만든 방식임에 틀림없다.
     MS사에서 한글 윈도우즈 95를 개발할 때 컴퓨터 사용자들은 한글의 생명을 죽이는 완성형을 버리고 조합형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며 서명운동까지 벌였다. 그러나 MS사에서는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결국 완성형을 바탕으로 하여 윈도우즈 95를 내놓았다. 그때까지 사용자들이 완성형으로 만들어 놓은 문서를 조합형으로 변환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이 천문학적일 것이라는 점과, 이미 완성형으로 만들어진 갖가지 소프트웨어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용자들이 조합형을 요구한 까닭은 다음 몇 낱말을 윈도우즈 95에서 입력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똠방각하", "퓩! 소리", "전홥니다." 이런 낱말을 입력하면 윈도우즈에서는 "또ㅁ방각하", "퓨ㄱ! 소리", "전화ㅂ니다"로밖에 입력되지 않는다. 윈도우즈에는 "똠", "퓩", "홥" 등에 대한 그림이 차지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hotissues_wansong.jpghotissues_johap.jpg
완성형 한글의 문제점
(삼성 [훈민정음] 입력화면)
조합형 한글의 가능성
(한글과 컴퓨터 [한/글] 입력화면)

     윈도우즈에서 완성형 한글을 채택한 것은 기업의 경제논리로 보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국내에서 IBM 호환기종 외에 또 많이 쓰이는 컴퓨터는 매킨토시인데, 여기에서 쓰이는 한글 역시 완성형이다. 두 가지 기종의 컴퓨터에서 모두 완성형을 쓰는 까닭은 역시 "만들기 쉽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사실은 쉬운 정도가 아니라, 다른 나라용으로 개발해 놓은 것을 거의 그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입력하는 방식만 따로 만들고, 완성된 "그림"만 바꾸어 놓으면 그만이다. 최초에 우리나라에서 쓰던 한글 타자기를 만드는 과정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영어용 타자기에서 활자를 떼어낸 다음 한글 활자로 바꿔 붙이고, 한 타 칠 때마다 한 칸씩 넘어가는 영어와는 달리 글자 하나가 완성된 뒤 다음 칸으로 넘어가게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완성형 한글에 들어가 있는 몇 가지 전각(全角)문자를 보아도 짐작이 간다. 전각문자란 한글 글자와 같이 원고지 한 칸을 차지하는 문자를 말한다. 전각문자의 절반 크기를 차지하는 문자는 반각(半角)문자라고 한다. 원고지에서 반 칸을 차지하는 문자, 즉 마침표 등과 같은 구둣점, 숫자, 영문자 등을 말한다. 이들 반각문자는 완성형 한글이 필요없이 영문상태에서 그냥 입/출력이 가능하다. 이런 반각문자를 전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어 한글에서 조합이 가능한 글자 가운데 80% 가까이를 버리면서까지 이런 문자 수백 개를 꼭 완성형 한글에 배당해야 했을까. 일본에서 이런 문자를 전각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지 아닌지를 생각지도 않고 그냥 만들어 넣은 것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그리고 기존 소프트웨어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과 기존 문서를 변환하는 데에 비용이 든다는 이유도 설득력이 없다. 완성형 한글이 한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만큼 언젠가는 조합형 또는 그보다 나은 방식(예컨대 확장조합형)으로 옮겨갈 것이고, 그때에 가면 비용이 더욱 많이 들 것이다. 어차피 바꾸어야 한다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바꾸는 것이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이다. 100년, 200년이 흘러가면 그때에는 정말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 [한/글] 형식으로 된 문서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완성형으로 된 문서를 조합형으로 바꾸는 비용도 생각만큼 많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한글의 기본 원리를 포기해야 할 정도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이들 기업체에서는 정말 사용자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위해 완성형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기업의 이익을 위해 핑계만 대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글을 컴퓨터에서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단지 문자를 입력하고 출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은 대부분 언어로 이루어지는데, 컴퓨터가 사람의 언어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면 그만큼 생각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든다. 나아가 이런 상태로 세월이 흘러 컴퓨터가 세상살이에서 차지하는 중요도가 절대적으로 높아졌을 때, 그때에 이르면 컴퓨터의 한계를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로 여기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즉 완성형 한글은 우리의 창의력마저도 구속하는 방식인 것이다.
     조합형 한글에는 완성형 한글이 지니지 못한 또하나의 중요한 장점이 있다. 그것은 한글이 발전해 나갈 여지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한글이 고어를 포함한 한글 자모 28자, 혹은 현대어 한글 자모 24자에서 성장과 변화를 멈추리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오늘날 한글에서는 영어의 "v"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이를 표기하기 위해 고어에서 "ㅸ"(순경음 ㅂ)을 되살려 쓸 수도 있다. "very"를 한글로 표기하기 위해 "베리"를 쓰지 않고 "ㅸㅔ리"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f"를 표기하기 위해 만일 "ㆄ"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쓴다면 "fine"을 "ㆄㅏ인"으로 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고어로부터 "ㆍ"(아래 아)라는 모음 하나를 현대어에서 되살려 쓰기로 한다면, 학교에서는 아마도 '이런 모음을 하나 쓰기로 했는데, 그 발음은 이런 식으로 나고 사전상에서 위치는 모음 제일 끝이다' 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에서 완성형을 바탕으로 하면 새로운 음운을 추가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완성형인 경우에는 한글 음절이 532개 늘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음운 하나가 늘어난 것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글자(음절)를 한 개 한 개 그림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완성형을 바탕으로 할 경우에는 이렇게 늘어난 532개의 그림을 컴퓨터 코드상에서 놓을 자리를 마련하느라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조합형을 바탕으로 하면 문제가 대단히 간단해진다. 학교에서 가르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일이 끝난다. "ㆍ"라는 음운 하나만 추가하면 되는 것이다.


[한/글]과 한글
운영체계에서 한글을 제대로 나타내줄 수 없을 때에 사용자가 택할 수 있는 대안은 얼마 없다. 집 주인이 세입자 편의를 생각지 않고 마음대로 짓고 뜯어고친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 처지에서는, 집 구조에 맞춰가면서 최대한 편리하게 살 수 있도록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윈도우즈라는 집에서 살고 있는 우리 세입자가 참된 한글을 이용하는 방법은 한글 부분이 제대로 된 도구를 만들어 쓰는 길뿐이다.
     한글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아마 워드프로세서(word processor: "글틀"이라 부르기도 한다)일 것이다. 워드프로세서는 문서를 만들고 편집하고 인쇄하고 보관하기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완성형 한글을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는 삼성의 [훈민정음]과 MS사의 [MS-Word] 등 대단히 많다. 그 까닭은 한글을 입력/출력하는 부분을 윈도우즈에 맡겨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측에서는 그만큼 시간과 비용이 적게 걸린다. 그리고 그만한 비용과 시간과 두뇌를 프로그램의 다른 부분에 투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업간 경쟁에서 조합형 한글을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
     윈도우즈에서 조합형 한글을 쓸 수 있게 만든 워드프로세서는 [한/글] 한 가지뿐이다. 조합형 한글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에는 그에 따른 부담이 있다. 한글을 입/출력하는 부분을 윈도우즈에 맡길 수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을 따로 설계해야 하고, 글꼴도 따로 만들어야 한다. 이문제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설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한컴사가 맞이한 위기의 원인은 "완성형"이라는 '근원불명의 표준' 역시 한몫을 차지하는 것이다. 운영체계에서 조합형 한글을 지원했더라면 그만큼 개발비용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글]에서는 소위 "확장조합형"이라는 방식을 이용하는데, 여기에는 한글 고어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조합형이 11,172자에 이르는 현대 한글 음절을 나타내는 데 비해 [한/글]의 확장조합형은 현대어와 고어를 합한 25,792자 이상을 만든다. 그 나머지 부분에 외국어와 한자, 기타 부호를 배정한다. 한글사전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한글 입/출력 방식은 현재로는 이 "확장조합형"뿐이다. [한/글]은 이처럼 현대어 한글뿐 아니라 고어, 나아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한글의 미래 모습까지 싸안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이 이상 우리말을 제대로 살려내는 워드프로세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거의 장악한 MS-Word가 유독 한국에서만 [한/글]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한/글] 개발 포기가 지니는 의미
[한/글]의 위기는 한글문화의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한컴사가 기업간 경쟁에서 탈락하고 역사에서 사라진다면 나름대로 아쉬움이야 남겠지만 큰 일은 아니다. 철저하게 적자생존이라는 경제논리를 잣대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을 단순히 위기에 처한 한컴사의 상품 하나로만 볼 수는 없다. 각종 워드프로세서를 포함한 모든 국내 소프트웨어가 완성형 한글을 바탕으로 "쉬운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동안 오로지 [한/글]만이 제대로 된 한글을 추구해왔다. 그런 만큼 [한/글]은 한글창제의 철학과 이념을 이어가는 한민족의 고유문화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한/글]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물론 우리는 [한/글]을 대체할 만한 워드프로세서를 만들기 위해 부심할 것이다. 괜찮은 소프트웨어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적게 잡아도 2~3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 그동안 사용자들은 무엇을 쓸 것인가? 아마 일단은 무상으로 공급하는 외제 워드프로세서나, 아니면 컴퓨터를 구입할 때 "끼워" 파는 국산 워드프로세서를 고를 것이다. 또한 그동안 [한/글]의 위세에 눌려 있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이 기회에 자사 제품을 워드프로세서 표준으로 만들고자 이전투구에 나설 것이므로, 이런 워드프로세서로 사용자층이 옮겨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사용자들은 여태 만들어 놓았던 무수한 [한/글] 문서를,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모두 이런 워드프로세서 형식으로 바꿀 것이다. 그리고 새 워드프로세서 형식으로 바꾼 문서를 인쇄할 때마다 중간중간에 공백으로 나타나는 자리를 찾아 일일이 점을 찍고 "똠" 자를 써넣고 "홥" 자를 그려넣을 것이다.
     그리고 2~3년 뒤 한글을 제대로 쓸 수 있게 해 주는 "괜찮은" 워드프로세서가 나왔을 때 사용자들은 반응은 어떨까?
     [한/글] 살리기 운동이 벌어졌을 때 한국 외국어대학교 유재원 교수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워드프로세서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애초부터 그리 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유 교수의 기사는 정보통신부 배 장관의 발언과 내용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해봐야 소용없으니 MS사 같은 거대기업의 은총에 의지하며 살자는 내용이다.
     만일 일반 사용자들이 이들과 같은 의견이라면 몇 년 뒤 "괜찮은" 워드프로세서가 나왔을 때 사용자들은 이를 외면할 것이다. 그 까닭은 배 장관과 유 교수의 주장대로 이 새 워드프로세서 역시 몇 년 뒤면 사라질 것이고, 또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문서를 새 워드프로세서 형식에 맞게 바꾸는 것 역시 번거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사용자들이 이들과 의견이 다르다면 [한/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컴사의 운명과는 달리 별도의 운명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그 형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국민주를 모집하여 국민의 기업이 되거나, 아니면 한글문화가 중대한 만큼 정부에서 공익사업으로 추진할 수도 있겠다.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한민족도 현 정부도 단지 몇 천만 달러라는 투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한글문화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글문화의 포기는 바로 유 교수가 우려한 "민족의 얼이라 할 수 있는 말과 글에 대한 우리의 자율권을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차례
  1. 인터넷과 표현의 자유 - 제이크 베이커 사건
    <시민과 변호사>, 1998년 4월호
  2. 인터넷 보안 - 해커와의 전쟁
    <시민과 변호사>, 1998년 5월호
  3. 에로티시즘과 포르노 - 규제와 자율의 갈림길에서
    <시민과 변호사>, 1998년 6월호
  4. 컴퓨터와 한글 - 우리말 살리기
    <시민과 변호사>, 1998년 7월호
  5. 인터넷 카메라 - 보여주고 싶어요
    <시민과 변호사>, 1998년 8월호
  6. 컴퓨터와 2000년 문제 - 세상 끝날?
    <시민과 변호사>, 1998년 9월호
  7. 인터넷과 한글 - 영어 모르면 문맹?
    <시민과 변호사>, 1998년 10월호
  8. 인터넷형 "번지내 투입" - 전자우편과 스팸
    <시민과 변호사>, 1998년 12월호
  9. 긴급진단 - 밀레니엄 버그
    <시민과 변호사>, 1999년 1월호
  10. 인터넷 주소 투기 - 앉으면 주인?
    <시민과 변호사>, 1999년 2월호
  11. 인터넷과 전자상거래 - 무일푼으로 사는 세상
    <시민과 변호사>, 1999년 3월호
 암호: 
손님생각
이름내용
생각을 쓰신 분이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쓰시면 1착이 됩니다. ;-)
저작권 (저) 1997-2017, 권루시안Creative Commons Lic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