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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읽을거리뉴질랜드 방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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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the hand is laid on the Pluff | |||
<TODAY>, 1988년 9월호 길지 않은 내 인생 경력에 '뉴질랜드에서의 1년'이 보태지게 된 것은 작년 4월의 일이었다. 1년간 거기서 지내면서 학기중에는 신학생으로, 방학 때에는 선원선교센타(Seafarers' Centre)에서 외항선원들을 대상으로 봉사와 상담활동을 하는 채플린(Chaplain)의 역할을 수행할 목적으로 그 곳의 초청을 받아 가게 된 것이었다.cultural difference라는 것을 단단히 마음에 새겨 두었던지라, 'internationally lost'를 염려하는 친구의 농담도 가벼이 흘리고 김포공항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럭저럭 농담도 주고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나름대로' 구사할 수 있었으니까, 도중에 방콕과 시드니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비행기 여행을 권하고 싶지 않다. 기내에선 쉴 새도 없이 먹을 것이 나오는데, 그것은 비행기라는 것이 워낙 공간이 좁기 때문에 가능하면 앉아서 턱운동만 하라는 뜻일 게다. 그렇게 이삼십 시간을 여행하고 나면 jet lag라는 증세를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그만큼 지루하고 불편하고 갑갑한 것이 비행기 여행이다. 뉴질랜드는 호주 바로 곁에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호주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 뉴질랜드 입장에서 본 호주를 재미나게 설명해 주는 그림을 어떤 사람이 입은 티셔츠에서 본 일이 있다. 셔츠에는 커다랗게 뉴질랜드의 두 섬이 그려져 있었고 그 왼쪽에 조그맣게 호주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큰 두 섬은 각각 NORTH ISLAND와 SOUTH ISLAND라 쓰인 반면 조그만 호주에는 WEST ISLAND라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도시 Auckland가 나의 목적지였다. 문제는 도착하면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짐이라고는 책 몇 권과 수첩이 든 가방과 자질구레한 옷가지가 몇 개 든 옷가방이 전부였는데, 꼬리표를 달아 화물칸으로 보낸 옷가방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도중에 갈아 타면서 다른 비행기 속에 버티고 나오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에는 공항 직원에게 내가 지낼 성공회 신학교 주소를 알려 주고는 공항을 떠났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할 때 흔히 하는 실수가 장(長), 단(短)모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있던 기숙사의 사람들은 다들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 선원선교 관계로 오는 사람이니 더부룩한 구레나룻에 털복숭이 팔과 다리, 그리고 터질 듯한 허리에 삐져 나온 배꼽 근처의 구릿빛 살갗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나를 보는 순간 모든 기대는 무너졌다. 그리하여 거듭 내 체류 목적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I am supposed to work for the seamen's mission." 며칠간은 내가 무엇인가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 위험할 때도 있다는 것을 '목숨 걸고' 느꼈다. 목숨을 걸게 된 그 대상은 우리와는 반대로 되어 있는 차선이었다. '자동차는 오른쪽'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었으니까. 건널목이라 할지라도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 길을 건널 때는 우선 차가 다가 오리라고 생각되는 왼쪽을 쳐다보면서 차도에 발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 우리네 습관이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는 가장 안전하게 길을 건널 참이었는데, 뉴질랜드에서는 그것이 장례식으로 연결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떼면 거의 예외 없이 내 오른편에는 갑작스레 뛰어든 나 때문에 불의의 기습을(?) 당한 자동차가 나를 노려보고 멈춰 있었다. Auckland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부활절이 닥쳤다. Alison이라는 여학생이 기숙사 휴게실에서 부활절 달걀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뭔가 내가 했던 말에 또한번 나는 그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부활절 달걀을 만든다'는 의미의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서 "You are producing Easter eggs."라 했던 것. 그 순간 거기 모여 있던 학생들이 박장대소했다. 부활절 달걀을 '낳고' 있다는 뜻이 되었으니, 그것도 여학생에게. 본의 아니게 실수한 것이 brilliant joke가 된 것이다. 부활절이 되자 Alison은 내게도 달걀을 하나 주었다. 근데 그 달걀, 보나 마나 무정란이었을 게다. 비록 영어에 관한 지식이 꽤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나는 영어에 있어서 초보자에 불과했다. 가장 회의를 많이 느끼는 때는 역시 여러 사람이 두서없이 잡담을 할 때이다. 수업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일정한 주제에 특정한 단어들이 주류를 이루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영어로 생각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AFKN을 30% 정도 알아 듣는다면 누구든 그 사람은 유학 가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잡담의 경우는 다르다. 유머감각도 우리나라와는 다른 데다가, 입과 귀와 또 그 입과 귀를 들락거릴 소재가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잡담의 '예술'이 탄생되기 때문에 그 예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든 것을 준비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내 스승으로 삼은 것이 TV였다. 어떤 의미에서 내 수업은 한밤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낮엔 내 공부, 밤에는 영어 공부. 워낙 바보상자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게 TV가 없다는 것이긴 했어도) 그건 예외였다. 어느날이었다. 그 날 나는 mothering 하기를 좋아하는 Christine이라는 기숙사생과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경 한 귀절을 인용할 필요를 느꼈다. 그 귀절은 바로 이것이다. 'Once the hand is laid on the plough, no one who looks back is fit for the Kingdom of God.'(Luke 9:62) 그 뜻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적당치 않다'는 것이었지만, 이내 나는 영어에 수많은 예외가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만 했다. Christine도 신학생이니 그 정도 귀절은 쉽게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주저 없이 읊어 내렸다. 문제의 단어는 plough였다. 몇 개의 단어가 plough의 출마를 지지하고 있었다 -- 내 머리 속에 rough, cough, tough 등이 떠오른 것이었다. 나의 확신에 그런 증거까지 나서자, 조금치의 망설임 없이 실수를 하기란 한결 쉬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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