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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Once the hand is laid on the Pluff
    <TODAY>, 1988년 9월호
  2. No "Ploblem"!
    <TODAY>, 1988년 10월호
  3. Bach, BARK!
    <TODAY>, 1988년 11월호
  4. Even dogs can understand English
    <TODAY> 1988년 12월호
  5. Post-Christmas Letdown After Santa Died
    <TODAY> 1989년 1월호
  6. Neptune's Rebel
    <TODAY> 1989년 2월호
Even dogs can understand English
<TODAY> 1988년 12월호
9월에는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서 열흘 정도 머무를 기회가 생겼다. 산업 선교 채플린 연수회에서 특별한 자격으로 초청을 받은 것이다. 웰링턴으로 가는 길엔 동체가 시내버스보다 조금 큰 쌍발 여객기로 North Island의 동해안 중간쯤에 자리잡은 Napier라는 아담한 항구도시에도 들렀다. 연수회에 때맞춰 선원선교 관계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이피어는 시 전체가 공원 같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뉴질랜드의 나폴리라고 불린다고 했다. 회의가 끝난 후 다들 부두를 둘러 보러 갔다. 우리나라에도 이 항구에서 펄프를 수입해 온다는 설명을 그 부두 책임자로부터 들었다. 커다란 창고에는 선적을 기다리는 펄프가 잔뜩 쌓여 있었다. 화물선이 부두로 들어오다가 부두를 들이받는 덕분에 수백 톤이나 되는 부두 콘크리트 구조물이 한 덩어리로 배에 떠밀려, "다행하게도" 1m 정도밖에 움직이지 않은 사고도 그 얼마 전에 있었다고 했다. 하긴, 더 밀려서 물에 잠겨 버렸더라면 입출항에도 곤욕을 겪었을 것이고 막대한 공사비도 골치거리였을 게다. 장비를 동원하여 원래 위치로 끌어 당겨 단단히 붙들어 매 놓은 것이 보였다.

웰링턴에서 지내기로 한 신부님 댁에는 개가 두 마리 있었다. 때는 수요일, 연수회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나흘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을 날짜만 세다가 보내 버릴 내가 아니었다. 다음날은 신부님이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셨다. 수도라고 하지만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닌지라 자동차로 다니는 데에는 반나절 남짓 걸렸다. 그리고는 혼자 탐험하기로 작정했다. 낮에는 신부님도 바쁘게 다녔으므로, 혼자 나가려면 문을 잠궈 놓고 나가야 했다. 잠그는 거야 문제가 아니었지만 두 마리 개는 충분히 문제 거리였다. 그 녀석들을 집 안에 남겨 두고 나가면 급할 경우 카페트 위에다 "실례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내보내기로 마음을 정한 후 행동에 옮겼다. 처음에는 어쩌나 보기도 할 겸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우리말로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곧 돌아오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녀석들, 나의 '이상한' 행동에 잔뜩 혀를 내민 채 꼬리를 흔들고만 있을 뿐이었다. 먹을 것이라도 줄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짧은 영어 실력이 개들에게까지 탄로날까봐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영어로 말했다. "Stay out, Dogs, until I come back." 손짓 발짓을 이번에는 쓰지 않았다. 그랬더니 순순히 현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Even dogs can understand English!" 그러나 그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개도 우리말을 알아 들으니까.
      웰링턴의 첫 사흘은 그렇게 개들이랑 놀고 시내 구경을 하느라고 지나갔다. 거기 있는 한인 교회 목사님도 만나고 주 뉴질랜드 한국 대사님을 만나기도 했다. 배를 오래 타서 기름 냄새가 나는 한국제 라면을 먹으며 밤이 새도록 한국 학생이랑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웰링턴에는 그래도 한국 학생이 꽤 있었다. 오클랜드에는 열 살 정도 되는 애들까지 합쳐도 열두어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웰링턴에는 한때 한국인 식당이 생길 정도로 한국인이 제법 많이 있었다. 그 식당은 수지가 안 맞아 이내 문을 닫았다고 한다.
      나머지 일주일 동안은 역시 연수회에 참가했다. 산업 관련이니 당연히 현장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가 보게 된 곳은 Max Factor라는 화장품 공장이었다. 화장품 공장이라 화공약품 냄새가 지독하게 났는데, 어느 정도이냐 하면, 둘러 보고 나오기까지 약 한 시간에 화장품 냄새가 옷에 배어 나중에는 온몸에서 여자 화장품 냄새가 날 정도였다. (같이 연수를 받는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얼마간 설명이 필요했다.) 공장 한쪽에선 뭔가 색을 혼합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가서 알아 보니 립스틱을 실험하는 중이란다. 그런데 립스틱 색깔이 참 묘했다. 노란 원색이었던 것이다. 담당인 아가씨에게 잘 팔릴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꽤 수긍이 감직한 대꾸를 해 주었다. "Well, they spray their hair in red." 머리를 빨간 스프레이로 뿌리는 판에 노란 립스틱이 뭐 대수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눈여겨 살폈어도 노란 립스틱이 시판되고 있는 것은 본 일이 없다.

오클랜드에는 Korean Barbeque라는 한국 식당이 있다. 영문도 모르는 한국인 선원들이 반가운 나머지 가 보려고 내게 그 위치를 자주 묻곤 했다. 나도 한 번 가 본 일이 있다. Bill의 생일 때였다. 대부분 학생들에게 그 식당은 단연 인기였다. 식탁 위에 가스렌지가 놓인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식사중에 자기가 직접 알맞게 구워 먹는다는 것도 커다란 매력이었다. 한 끼에 대략 1만원 정도인데, 그 정도면 비싸다고는 할 수 없어도 결코 싼 편은 아니다. 중국식 부페가 6천원 정도 했으니까. 조용필 씨의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 주던 ..." 주인은 틀림 없이 한국인이겠다 싶어 두리번거렸으나 한국인은 나뿐이었다. 알고 보니 그 식당도 희한한 곳이었다. 주인은 미국인이고, 그 미국인은 호주에 있는 한국인 식당에서 일한 적이 있단다. 호주의 한국 식당은 한국인이 직접 경영했다나. 그러니까 미국인이 호주에서 한국인에게 한국 음식을 배워 뉴질랜드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중에 한 한국인이 미국인의 한국 음식 맛을 본 날이 바로 Bill의 생일이었다. 음식 맛은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그 날의 한국인은 자기도 난생 처음 먹어 보는 한국 음식 맛을 보았다.

웰링턴에서 돌아온 얼마 후 학교에서는 공부에서 오는 피로와 스트레스도 풀 겸 장난도 칠 겸하여 Water Week라는 행사를 벌였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대충 '물장난 주간' 정도 되겠다. 말 그대로 물장난을 치는 주간이다. Water Week을 맞이하는 학생들의 준비는 용의주도했다. 크게 불어 봐야 참외 하나 만한 풍선을 물폭탄 제조용으로 수백 개씩 사는 학생도 있었고, 언뜻 기관총 같이 생긴 물총을 산 학생도 있었다. 나도 호신 겸 공격 겸 홍콩제 물총을 샀다. 손바닥에 놓고 손가락을 오므리면 손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쬐끄만 권총 모양 물총이 세 개 한 조로 된 것인데, 작지만 한 방 맞으면 꽤 축축한 기분을 주는 것이었다. 쓰일 데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쏘는 것을 무작정 맞고만 있을 나는 아니었으므로 기분상으로도 갖고 있음직했다.
      물장난을 위한 준비로 부산한 일요일 밤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자 교내에 방이 나붙었다. "WATER WEEK"이라고 쓰인 밑에는 배점 원칙이 있었다. "뉴질랜드 수상 - 1천 점, 대주교 - 5백 점, 학장 - 2백 점, 교수 1백 점 ..." 잡다한 규칙도 적혀 있었다. "책을 든 사람을 쏘면 벌점, 들통이나 소방용 호스는 사양함(퇴장),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실외에서만 가능, 어린이와 노약자는 제외..." 등등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는 내용이 익살꾼 Russell의 글씨로 적혀 있었다. 물벼락을 피하기 위해 책을 이고 다니는 교수도 있었고 아이를 안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지만, 교수님들은 대충 한 번씩은 옷을 적셨다. 뉴질랜드 수상을 쏘는 행운을 잡은 학생은 없었다.
      Water Week이 거의 저물어 금요일 저녁이 되자 기숙사 학생들은 아쉬운 나머지 규칙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설거지 당번이었던지라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기숙사 휴게실로 돌아오는데, 어디선가 날카로운 것으로 유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숙사 제1의 Public Enemy인 Robert가 표적이 됐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함께 있던 서너 명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제각기 방으로 날쌔게들 움직였다. 물총과 물폭탄을 준비하기 위함인 것은 물론이다. 굳센 Robert는 이번에도 일단 물벼락을 피해 복도로 방으로 열고 닫는 "작전상" 후퇴를 실시했다. 한 순간 발소리가 뜸해졌다. 비명도 그쳤다. 도망만 다니던 Robert의 손에 그럴 듯한 무기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식탁 위의 플라스틱 케첩 병을 어느 틈에 씻었는지, 그 병에다 물을 담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던한 Robert였다. 잔뜩 물을 뒤집어 쓴지라 꽤 젖었지만 그래도 그는 유쾌한 웃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나머지 학생들은 손과 발뿐 아니라 머리도 쓰기 시작했다. 포위작전을 벌인 것이다. 잠시 후 초고주파의 비명은 다시 방송을 시작했고 발소리도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어느 순간 단말마의 비명이 들리더니, 역전의 용사들이 하나 둘씩 만면에 희색을 띠고 휴게실로 돌아왔다. 비명의 주인공은 당연히 Robert였지만, 비명의 원인이 된 사람은 잠시 후에 개선했다. 그는 다름 아닌 Viliami였는데, 어디선가 숨어 있다가 기습공격을 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무기는 들통이었다. Robert가 도망 올 길을 지키고 있다가 들통에 가득 담은 물을 그대로 뒤집어 씌운 것이다. 이윽고 여전히 싱글벙글한 Robert가 휴게실에 나타났다. 카페트 위에다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잘 즐겼으므로 그도 만족스러이 웃었고,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만 같아 보이는 그를 보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승전의 폭소를 터뜨렸다.

여름 방학이 지나 다들 돌아오고 Robert는 아직 영국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체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신학기에 새로 들어오는 학생을 위해 전망이 좋고 볕도 잘 드는 2층의 북향 방을 양보하고 3층의 남향 방으로 옮겼다. Robert의 바로 옆방이었다. 새로 옮긴 방은 비교적 어둡긴 했어도 아늑하고 깨끗한 데다가, 침대에 누우면 하늘이 바로 보이는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점은 꼭 하나 있었다. 바로 Robert의 옆방이라는 점이었다.
      그 점이 또한 마음에 들기도 했다. Robert가 영국으로 간 사이에 짖궂은 학생들이, 워낙 지저분하여 Robert가 여러 가지를 덕지덕지 빼곡히 붙여 놓은 그의 방 문 여백에 재미난 표지를 달아 놓았다. 학생들에 따르면 속칭 elephant glue라고 하는 초강력 접착제로 붙여 놓았단다. 그 표지는 "MEN"이란 것이었는데, 근처 어디의 화장실에서 떼 온 것임이 분명했다. 오며 가며 그 표지를 보고 웃을 수 있었으니 나의 새 방이 과히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일소일소라고 하지 않았던가. Robert는 돌아오자마자 그 표지를 떼어 내었는데, 어떻게 떼 냈는지는 불가사의이다. 그 접착제는 TV 광고 때에 그걸로 붙인 고리를 사용하여 코끼리를 들어 올렸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니, 접착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새 방에서 며칠이 지나자 그 방의 결정적인 단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원인은 역시 MEN이라는 표지가 붙은 방 주인이 돌아왔다는 데에 있다. 새벽 세 시면 영락 없이 노래를 불러댔으니... 가냘픈 목소리에다 아슬아슬한 음정이 합세하니 이것은 다름 아닌 '월하의 공동묘지.' 그의 신종 '가곡의 새벽'을 나는 출국때까지 경청해 주었다. 기숙사의 학생들은 그런 나의 인내심에 혀를 내둘렀다. 나로서는 오며 가며 웃은 값을 단단히 지불한 셈이다.

방학 동안에는 커다란 기숙사가 적적하다고 느껴지던 차에, Matron 할머니가 사택을 지켜 달라고 하여 Matron인 Shirley 할머니 댁에서 약 3주간을 지냈다. 그동안 나의 임무는 그 집 안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어항 둘의 금붕어를 먹이는 일이었다. 괜찮겠다 싶어 그 집으로 덜컥 옮겼으나 문제는 이튿날 아침부터 발견되기 시작했다. 화분에 물을 주긴 해야 겠는데, 따로 물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호스도 없었던지라 여기저기 뒤지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윽고 전부터 물주는 데에 이용되었을 것 같은 깨끗한 우유 병이 눈에 띄었다. 궁여지책으로 그걸로 물을 주는데, 주다 보니 화분이 좀 많다 싶었다. 그래서 세어 봤더니, 웬걸, 화분이 족히 30개는 되는 것이었다. 우유 병으로 매일 물을 두 병씩 삼키는 커다란 화분만도 대여섯 개, 게다가 방도 하도 여럿이라 물주는 데에만도 매일 평균 반 시간은 소요되었다. 내가 마침내 그 집을 비우던 날에 발견한 화분도 있다. 그 화분은 당연히 그동안 굶었지만, 다행히 마르지는 않았다.
      금붕어도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니다. 어항이 두 개였는데, 금붕어 두 마리가 있는 곳에서는 산소 공급기가 없었고, 네 마리 있는 것은 공급기가 있었다. 사흘 쯤은 무사히 지나갔을 게다. 나흘인가 되던 아침, 문득 부엌쪽에서 역한 내음이 풍겨 왔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반사적으로 달려가 보니, 아뿔싸, 어항의 물은 탁한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그 속에서 나만 의지하던 두 마리 물고기는 허연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이쯤 되니 다른 하나의 어항도 신경이 좀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들만은 죽이지 않으려고 먹이를 조금 덜 주기 시작했다. 산소 공급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사흘쯤 지났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물고기의 안부를 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에 속했으므로 그 날도 우선 어항으로 달려갔다. 염려하던 사태가 눈앞에 벌어져 있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전부 죽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떠 있는 것은 한 마리였다. 먹이를 적게 주니 배가 고픈 나머지 cannibalism을 행한 것이었다.
      나머지 세 마리가 나의 동정심 때문에 죽기 전에 고맙게도 Shirley는 돌아왔다.

그 사택에서는 잊지 못할 일이 많이 있었다. 음식 솜씨야 워낙 볼품이 없었지만 그래도 굶을 수는 없어서 직접 요리해 먹어야만 했다. 직접 요리한 음식은 보람으로 먹는 것이지 맛으로는 먹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래도 기숙사 식당에서 본 풍월은 있어서 큰맘 먹고 돼지고기를 요리해 먹기로 하고는, 약 3kg 되는 돼지고기 덩어리를 그대로 전기오븐에 넣었다. 뉴질랜드는 대부분 수력발전이어서 전열기를 많이 써도 세는 그리 비싸지 않다. 역진세를 적용하고 있으니 이런 복받은 국민이 또 있을까.
      그러나 한가하게 한국의 비싼 전기세를 탓할 때가 아니었다. 덩어리째 오븐에 넣은 시각이 오후 네 시. 두 시간이면 되려니 했다. 온도는 250도에 맞추었다. 그런데 저녁 여섯 시가 되도록 익을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다시 온도를 350으로 올렸다. 이번에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게 아닌가. 다 타는구나 싶어 후다닥 열어 보니 고기는 그대로이고 오븐만 과열된 것이었다. 뭔가 잘못 되었다 싶어 찬찬히 살펴 보니, 그 오븐은 섭씨가 아니라 화씨로 눈금이 매겨져 있었다. 고기를 요리해 저녁을 먹은 시각은 저녁 아홉 시. 허기도 가신 지 오래였지만 겉은 마르고 속은 약간 덜 익은 고기를 아니 먹을 수는 없었다. 섭씨와 화씨의 차이를 통해 요리한 고기는 일주일간이나 버텨냈다.

차례
  1. Once the hand is laid on the Plu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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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No "Pl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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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ach, B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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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DAY> 198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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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DAY> 198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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