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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읽을거리뉴질랜드 방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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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tune's Rebel | |||
<TODAY> 1989년 2월호 이럭저럭 예정된 한 해가 거의 갔다. 선원선교센터에서는 나의 귀국 여행편을 이리저리 알아 보기 시작했다. 물론 갈 때에 그 쪽에서 이미 왕복 비행기표를 내게 보내 왔기 때문에 꼭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학교 공부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연수라는 목적을 고려해 볼 때 비행기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배를 이용하면 더 유익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관계자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므로 선교센터의 수석 채플린은 거기에 초첨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배를 이용하는 편이 선원들과 같이 생활해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흠이 있긴 해도 그 쪽이 더 나았다. 비행기로 돌아오자면 우선 비행기의 좌석이 그네들 선전 만큼 충분히 널찍한 것이 아니라서, 근 30시간을 고문이나 다름 없는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노릇이었다.그래서 알선된 것이 P&OCL이었다. CL은 Container Lines의 약자. P&OCL은 영국의 화물 선박회사로서, 옛날에는 스페인 반도와 동앙(인도) 무역을 했기 때문에 Peninsula and Oriental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근래에는 스페인이나 인도 관련 화물은 이 회사가 다루는 전체 화물량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회사 이름을 다 풀어 쓰는 일이 드물다. 선원선교라는 것이 이 회사와 맺은 인연도 이미 수백 년이 되었고, 그래서 채플린이 배를 이용하여 여행을 하고자 할 때에는 제일 먼저 이 회사로 연락하여 협조를 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운임은 대체로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받지 않는다. 영어권에서는 약자로 된 기관이나 단체, 회사 등의 이름을 풀어 쓴다든가 하는 일은 거의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뉴질랜드에도 그 같이 약자로 된 이름이 많았는데, 그 본디말이 무엇인지에 신경 쓰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 보지 못 했다. ANZ라는 은행이 있는데 ANZ라는 말은 그들에게 그냥 '은행 이름의 하나'라는 뜻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AMP라는 이름은 그냥 '보험 회사 이름의 하나'. P&OCL도 매한가지였으나 역사가 오랜 회사라 대충 알고 있는 선원들이 꽤 있는 편. '가능한 한 빨리'라는 것의 약자는 이와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 경우는 머릿글자만을 딴 것이지만 통상 대화중에도 많이 쓰이기 때문인 듯하다. a.s.a.p.라고 쓴 것을 '에이 에스 에이 피'라고 읽는 것도 별ㄹ 못 봤다. attn은 어떤가. 이는 attention의 약자. 잘 살펴 보면 첫 모음 외의 나머지 모음을 모두 뺀 것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attntn이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attention으로 읽는다. 영어의 발생시기에는 모음이라는 것의 표기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좋은 연구 소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계속하자. 마침 뉴질랜드와 한국 사이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M/V Aotea라는 배가 있었고, 이미 그 배의 선장으로부터 묵시적인 동의를 구해 놓은 터라 협조를 구하기는 한결 쉬웠던 편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삼아, M/V는 Motor Vessel의 약자. 흔히 M/S(Motor Ship)라 하기도 한다. Aotea는 뉴질랜드 원주민들이 뉴질랜드에 붙인 이름 Aotearoa에서 온 이름. 전에도 설명한 바 있듯이 Aotearoa는 Land of Long and White Clouds라는 뜻이다. 이 배는 원래 뉴질랜드와 일본 사이만을 왕래하던 배인데, 한국과 뉴질랜드 사이를 오가는 상품이 많아짐에 따라 한국까지 노선이 연장된 지 꽤 되었다. 선장에 의하면 한국으로 올 때에는 주로 과일과 낙농 제품, 갈 때에는 주로 가전제품을 싣고 가는데 요즘은 원화 상승으로 거의 빈 배로 간단다. 이 배로 오클랜드에서 부산항까지 대략 3주가 걸린다고 했다. 배로 3주면 아주 빠른 것이다. 그것도 좁다란 의자에 앉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내던 성 요한 대학에서도 나의 귀국으로 인해 약간의 행사가 있었다. 그간 저녁 식사를 같이 나누지 못한 학생들은 번갈아 저녁 식사에 초청했고, 학교에서도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내게 시간이 언제 나느냐고 물었고 이어서 "Would you come for tea tonight?" 하고 제의했다. 이럴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tea라 한다 해서 그대로 '차(茶)'이겠거니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그네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겸손한 표현'이 있어서, 특히 저녁 때에 tea라 하게 되면 그것은 대개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도 모르고 그들이 하는 tea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차'로 해석하면, 그들이 정성으로 실력을 다 동원하여 차린 식탁으로 배가 잔뜩 부른 채 나가는 실례(?)를 범하게 되기 쉽다. 내 집에 초대된 손님이 (숟가락을 외면한 채) 젓가락질만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얼른 이해가 갈 것이다. 이제부터는 배에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규정상 화물선은 따로 객실을 마련하지 않은 경우에는 승객을 태울 수 없으므로 나는 supernumerary의 신분으로 배에 올랐다. 정원 외의 인원, 즉 가외의 선원이라는 뜻이다. 이 배의 크기는 화물선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그다지 큰 것은 아니다. 3주간 내가 쓸 cabin(방)을 선장이 직접 안내해 주었다. 캐빈 문 위에는 2nd Engineer Officer(2등 기관사)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침대와 책상과 개인 샤워가 딸린 호화스런 캐빈이 동양의 노란둥이 주인을 만난 것이다. 구조상으로 볼 때 제일 위 deck는(배에서는 층이라 하지 않고 deck라 부른다) Bridge라 하여, 말하자면 배의 지휘부라 부를 만한 곳이고, 다음 데크는 선장과 기관장과 Radio Officer의 캐빈이 있었고 내 캐빈은 바로 그 아래인 Officer들의 데크였다. 그 아래는 일반 선원들의식당과 캐빈이 있었고, 일반 선원들의 캐빈이 있는 데크를 하나 더 내려가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기관실이 데크 몇 개를 차지하고 있다. 배에는 특이한 식구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평선원(man)이건 사관(officer)이건 누구나 자기 아내와 함께 배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그 같은 선주측의 배려에 적지 않이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평선원과 사관을 통틀어 모두 네 명이 아내와 함께 승선해 있었다. 이들의 자격도 역시 supernumerary. 나랑 다른 점이라면 이들은 실비(實費)이기는 하나 여비를 제각기 부담해야 한다는 것. 여자 선원도 있었다. 몇몇 선박회사에서 '선원 위안부'를 승선시킨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화물선은 여성에게는 성역(聖域)에 해당하는데 여기에 25세의 젊은 여성이 배의 조종을 맡은 2등 항해사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원 중 말하자면 홍일점. 그러나 그녀는 그 우람한(근 1백 kg) 체구로 인해 화제의 인물이 될지언정 그 외에는 그다지 다른 선원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외로움이 특별히 많은 직업을 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이러했다. "It's rewarding. I worked in a fabric factory. The payment was not good. So I took this job. I like this job. I enjoy it." 몹시도 무덥던 어느 날. 이 Prodigal Padre가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은 항해를 시작한 며칠 뒤 적도를 지나던 날 벌어졌다. 적도는 배의 표준시로 12시경 지났다. 배는 경도상으로 30분만큼 이동할 때마다 표준시를 바꾸었기 때문에, 그 배의 표준시는 그 때 뉴질랜드 시간과 동경시 중간으로 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기관장이 내게 "You'd better change your cloths after lunch. The dirtier, the better." 무슨 말인가 물어 보았더니 그는 잠시 후에 알게 될 거라고 말하고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적도를 지나고 있다(We are passing the line)는 말밖엔. 그 말의 속뜻도 정말 잠시 후에 알게 되었다. '잠시 후'는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 순간 다가왔다. 그 여항해사와 한 선원의 아내가 COP'S라 쓰인 흰 모자를 쓰고 손에는 오라를 들고 '체포하러' 왔던 것이다. 희한한 것은 그들이 뉴질랜드에서 쓰레기를 담는 용도로 쓰는 1회용 비닐 쓰레기 봉지에 목과 팔구멍을 뚫어 입고 왔다는 사실. 동경까지는 13일이 걸렸다. 4월인데도 며칠 전 내린 눈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므로 맨발에 샌달만 신은 내 발은 동경 사람들의 눈에 충분히 띄는 것이었나 보다. 전철을 탔을 때에는 일부러 눈에 덜 띄려고 자리가 있어도 서 있었다. 그들이야 내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일본인과 다름 없었을 테니까 맨발 이외에는 특이해 보일 것이 없었다. 길가의 안내판에는 영어 발음도 표시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본 글자 밑의 한자 표기가 오히려 읽기가 쉬웠다. 물론 일본인들이 읽는 대로 읽은 것은 아니다. 그냥 우리 식으로 읽은 것이다. 어떤 한국인 유학생을 우연히 만났는데, 품천(品川) 역으로 가는 방향을 물었더니 품천이라는 역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시나가와'로 읽는 것 같더라고 했더니 깔깔 웃으면서 방향을 일러 주었다. 동경을 떠나 나고야, 고오베, 모지 항구를 거쳐 드디어는 부산항으로 향했다. 4월 18일, 때는 밤이었다. 자정 무렵, 라디오에서는 일본말 방송이 비교적 약해지고 한국 노래가 나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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