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우리"로 향하는 말과 글의 역사
『텍스트의 포도밭』의 모태가 된 책 이반 일리치의 후기 사상을 여는 대표작!
"우리는 농담으로라도 민속적 침묵, 즉 낱말과 언어와 글월이 존재하게 되기 이전의 침묵 어린 공존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책의 후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성찰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여전히 열려 있는 단 하나, 저 침묵의 공간을 바보처럼 그리워한다. 그것은 우정의 침묵이다."
이반 일리치의 후기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작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가 국내 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얼마 전 나온 『텍스트의 포도밭』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특히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가 그 속편 격인 『텍스트의 포도밭』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물론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는 현대사회의 시초로서 민중의 마음(심성, 지성)이 문자화(알파벳화)된 데 초점이 있지만, 넓게 보면 "테크놀로지로서의 문자와 읽기 기술"이라는 동일한 범주를 다루기에 두 책 간의 연관성은 생각보다 깊다.
즉 『텍스트의 포도밭』의 태반이 되고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문화적 맥락(context)을 보여주는 자궁 같은 책이 바로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인 것이다. "지식의 양식으로서 말과 글이 지닌 영향력"에 관해 배리 샌더스와 나눈 대화가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1988)라는 책이 됐고, 이후 이 책 속 "읽기의 궁극적 형태는 "글월(text)을 묵상하는 것"이다"라는 위그의 말이 실마리가 되어 『텍스트의 포도밭』(1993)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에 있기에 두 책은 나란히 읽을 때 더 큰 울림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1970년대와 분위기가 다른, 고전학자 이반 일리치를 보게 된다. 다급한 현안 앞에서만 신중하고 단호하게 대안을 제시하던 비판가, 생산성 과잉에 빠진 서구 산업사회와 그 바탕의 개발 이데올로기를 질타함으로써 자극과 성찰을 이끌던 날카로운 사상가는 이제 사회 비판보다 인간 개개의 내면 탐색에 치중한다. 이것이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의 문을 닫고 벗들과 책 읽고 묵상하고 대화 나누며 살던 1980년대 후반의 일리치다. 구체적인 개별 현안에 몰두하던 면모는 근원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전까지 일리치에게서 학교, 병원, 운송수단 등 제도화된 사회의 폐해를 경고하는 선지자적 외침이 컸다면 이제는 이 사회를 만든 우리의 안쪽, 나이테의 중심을 향한 운동이 돋보인다. 12세기 스콜라철학의 거장 생빅토르의 위그가 말한 렉티오 디비나(거룩한 독서)의 열망이 동반된 이 여정은 구술의 상실, 시각적 책의 탄생, 번역과 토박이말의 분화, 문법의 힘, 자기(the self)와 자서전의 발명, 반문맹 문자의 구속, 인공어 새말의 폭력 등 귀 중심에서 눈 중심으로의 변화를 다양한 예를 들어 탐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상상도 못할 만큼 멀리 떠밀려와, 방대한 정보의 세계에 갇힌 우리는 어떻게 참뜻에 닿을 수 있을까? 여정의 끝자락에서 이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담담히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말없이 나누는 "우리"와 "침묵"이 그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