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87년에 쓴 것입니다. 그 때는 이 글에서 다룬 내용을 주제로 연구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신학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군요. 누군가가 깊이 연구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원래 영어로 쓴 것을 한글로 옮긴 것입니다.
차례 시작하면서이 글에서 일컫는 생태학은 일차적으로 만유를 다스리는 하느님의 활동과 그 만유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개체를 주요관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만유(萬有)'라는 말은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 (니케아 신경), 물질적이고 영적인 것,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것, 생명 있는 것과 없는 것 -- 즉 모든 피조물을 일컫는다. 생물학에서 볼 때 생태학은 유기체와 주위 환경간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서 '환경'이라는 낱말이 지닌 뜻을 넓혀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원까지 포함시키고, 나아가 하느님까지 포함하도록 함으로써, 또 '유기체'라는 낱말 뜻을 넓혀 만유의모든 구성요소를 포함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생물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의 생태학을 얻을 수 있다. 이 의미의생태학에서는 하느님의 활동까지 고려하게 될 것이다. 생물학적 생태학에서는 생태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같은 변화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어서 마침내는 생태계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마지막 단계를 '극상'이라고 부르고, 변화 자체는 '천이'라 한다. 생물학에서 일컫는 '극상'은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는 '극상'과는 다를 것이다. 생물학에서는 개체와 환경이 평형을 이루고 있는 특정 단계를 극상이라고 한다. 환경과 개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이 평형은 깨어지기 쉽다. 평형을 이룬 생태계(즉, 극상에 이른 생태계) 내부에 변화가 생겨나면 생태계 전체가 새로운 천이과정을 거쳐 평형에 이른다 (새로운 극상에 이른 생태계). 이 새로운 극상은 처음 극상과는 다르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본 '극상'이 어떤 것인지는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창세기는 만유의 시작에 대한 옛 이스라엘 민족의 설명이기 때문에 창세기로 하느님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에서 일컫는 '극상'이 어떤 뜻일지는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제1장에는 창조된 만유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씌어 있다. 빛이 좋았고 (3-4절), 뭍과 바다를 가른 것이 좋았으며 (9-10절), 식물이 좋았고 (11-12절), 낮, 밤, 계절, 우주와 그 움직임이 좋았으며(14-18절), 생물이 보기 좋았다 (20-25절). 그리고 전체적으로 '정말 좋았다' (31절). 즉 하느님의 최초 생태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말이다. 개개 피조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피조물 무리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창조 그 자체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시 말해 새로이 창조된 만유는 극상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생물학적 극상과 다른 점은 생물학에서는 생태계가 천이를 거쳐 극상에 이르는 반면, 이 생태계는 처음부터 극상에 이르러 있었다는 점이다. I. 구약창조된 세계는 인간의 타락이 있기 전까지 전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인간은 하느님의 생태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개체 집단이자 동시에 환경의 일부분이다. 인간의 타락은 환경이 달라졌음을 나타낸다. 인간의 타락 때문에 전체 생태계는 새로운 천이를 시작했다. 창조된 만유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특별한 구실을 가지고 있었다. 하느님의 생태계를 '선하게'(즉, '좋게' - 극상에 이른 생태계) 유지하는 '주인' (창 1:28) 역할을 하는 것이 인간의 임무였다. 이 역할을 해 낼수 있도록 이들에게는 자율권이 부여되었다 (자유의지). 이들 각자에게 자율권이 있었고 -- 지금도 지니고 있고 -- 개개인의자율권이 모두 모여 전반적인 자율권을 이루고 있었다 -- 지금도 그러하다. 이들은 스스로 조화를 이루는 한편 전체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주인 역할을 해야 했다. 이것이 자율에 따르는 책임이었다 --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이 책임을 무시했기 때문에 새로운 천이는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극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천이가 어느 단계에 이르자 조화를 잃어버린 정도가 너무나도 심하여 하느님이 견딜 수 없게 되었고 (창세기 6장), 하느님은인간과 모든 생물을 지상에서 쓸어냄으로써 생태계가 다시 조화를 이루게 하기로 결심했다 (창세기 6장). 생태계 내의 다른 개체 때문도 아니고 하느님 때문도 아닌, 바로 인간 때문에 일어난 홍수가 끝난 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율과 책임을 다시 한 번 부여한다(창세기 9장). 전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 책임을 점점 무시하기 시작했고 자율권도 점점 더 남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하느님은 인간이 자율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책임을 질 수 있게끔 가르칠 필요를 느낀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구체적인 계명을 주고예언자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II. 신약하느님이 인간에게 가르침을 내린 의도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이해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이원적인사고방식이 생겨나고 흑백, 선악 등 만유를 보는 시각도 이원적으로 되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린 규범은 올바로 이해되지 못하고 갖가지 법과 규정으로 발전해 나갔다. 법과 규정에 따라 행한 것은 '선'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악'한 것으로 생각했다. 역으로, 선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법으로 규정하여 보호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법으로 규정하여 유죄로 못 박았다. 소위 선과악은 만유와 함께 천이 과정을 고스란히 거치고 있었으나, 이 천이는 하느님을 이해하는 인간의 이원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유는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사랑인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만유 자체는 선하다. 오로지 하느님에게 비교할 때에만 악할 수 있을 것이다. 태초에는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이원적인 사고방식을 하나로 합칠 필요가 있었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이같은 노력을 기울인 증거를 찾을 수 있는데, 욥기가 그 좋은 예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하느님의 창조물 속으로, 하느님의 생태계 안으로 내보냈다. 다른 피조물 무리가 아닌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보낸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자율권과 그에 따른 책임을 부여받아 있기 때문이었다. '말씀의 육화(肉化)'라 일컫는 이 사건은 하느님의 의지가 육화한 것이고, 나아가 하느님의 생태학, 하느님의 조화가 육화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이 부여받은 권한과 책임을 통해 하느님에게 온전히 일치된 응답을 하게 될 것이었다. III. 신약 이후의 역사말씀의 육화를 통해 역사 속에 변화가 일어났다. 규정된 법률이 무너져 인간이 자기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하느님의 생태계가 최초의 극상을 되찾을 길이 열렸다. 사람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주고받는(의로움으로써 보상을 받는) 관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일방적임을 깨달았다.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에 유대인의 임무였으나 (법과규정을 따르는 사람들) 이제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부여되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육화는 이처럼 조화에 이르는 새로운 전망이었고, 이로써 태초의 온전한 조화를 되찾아 모든 피조물이 하나로 화해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느님이 직접 제시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망은 다시금 온전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박해 같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바뀔 무렵 신앙은 인간의 정신적 혹은 종교적인 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방향을 잃은 또 하나의 천이가 시작되었다). 공인받은 뒤 기독교는 차차 비결과 같은 모습을 띠었고, 그리스도가 보여 준 원칙은 여러 가지 정의로 발전했다. 다시 규정으로 변한 것이다. 이 새로운 천이는 종교개혁 때까지 지속되었다. 종교개혁 덕분에 기독교는 비결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이전 시대의 영향이 너무 깊은 나머지 여전히 종교적 혹은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기독교 내에는 이원적인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영지(靈知)주의 경향마저 자리 잡게 되었다. 알면 구원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소위 영적인 면과 물리적인 면,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이 서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심리학과 해방신학 등이 나타남으로써 생겨난 새로운 경향이다. IV. 몇 가지 논의사항이제까지 창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생태학과 생태계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하느님의 생태학이라는 개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창조이야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이 개념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사고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래에 몇 가지 의문점을 써 보았다. 1. 이원적 사고방식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마음은 이원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하면서 접어두고 지나칠 수도있겠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도가 심각하다. 예를 들면 범법자란 법을 어긴 사람을 말하는데, 법은 또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선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범법자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게 되고, 이 '악인'은 교도소로 보내진다. 그러니 교도소가 사회로부터 악을 격리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만일 교도소가 악을 위한 장소라면 사회도마찬가지이다. 사회가 선을 위한 곳이라면 교도소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여성운동은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며, 한쪽이반대쪽의 노예가 되거나 서로 맞서 싸우기 위함도 아니다. 최초의 극상을 이룩하기 위해 협력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이런 노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여성운동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남성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느님에게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책임이 있다. 합법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선과 악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악이란 선이 없거나 부족한 상태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음과 양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산봉우리와 골짜기 사이의 관계와 같다. 이원적 사고방식을 극복해야 할 또하나의 이유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노예가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노예는 주인을 두려워한다. 거기에는 자율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 이원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으면 자율을 포기하게 된다. 거기에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자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생태계는 그에 따라 천이를 겪게 될 것이다. 2. '발전'과 '개선'발전이란 펼쳐 늘어놓는 것이다. 이 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펼쳐놓는가'이다. 발전이라는 낱말을 정의하는 데에 수많은 낱말을 끌어 붙일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말에는 방향감각이 없다. 일이란 더욱 악화되는 쪽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은 대부분 발전을 위한 것이며, 그 결과 사물은 온갖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한편 하느님의 생태계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다. 만일 하느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이 자율을 내세워 하느님의 생태학을 따르지 않는다면 발전은 생태계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어쩌면 '개선'이라는 낱말이 발전을 조화로 이끄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만일 개선이 더 '좋아진다'는 뜻이라면. 3. 인간사회자본주의는 자본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현재 인간세계를 전반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한 인간의 가치가 다른 인간의 가치와 같을 수가 없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본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본이 같다고 해도 그것으로 얻는 이윤이 다르다. 결국 99원의 이윤을 얻는 사람은 이윤을 1원 얻는 사람보다 99배 중요하다. 이윤을 조금도 내지 않는 사람은 아무가치도 없다. 한편으로 민주원리가 (소위 '민주주의')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궁극적으로 민주원리와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서로 협력하기만 한다면 나란히 적용될 수 있다. 이는 민주원리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와 나란히 적용될 수 있는 것과 실현가능성이 같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움직이고, 민주원리는 다수를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근본적으로 조화를 고려에 넣지는 않는다. 4. 민주와 신주하느님의 생태계에서는 민주원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수가 민주라는 이름으로 소수를 희생하면서 자율을 이용하는 동시에 결정을 내리기 전과 내린 다음에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민주원리가 자본주의와 결합되면 민주는 다수의 자본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만일 공산주의와 결합되면 공산주의의 운용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 밖의 이념과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원리에서는 99사람의 가치는 한 사람의 가치보다 99배 크다. 한 사람의 가치는 물론 다른 사람의 가치와 같기 때문에, 민주원리로는 예수의 잃어버린 양 우화를 이해할 수 없다 (눅 15:4-7). 이 우화에서는 99마리의 양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가치가 같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하느님의 생태학에서 구성원 하나하나는 똑같이 중요하며, 두 구성원의 가치를 합한 것 역시 어느 면으로 보아도 하나의 가치보다 중요하지 않다. '신주(神主)'란 바로 이런 것을 나타낸다. 5. 교회사도 바우로의 편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회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기독교 공동체가 그 수준에 이르고자 애쓰는 이상적인교회이다. 나머지 하나는 기독교 공동체가 현재 이루고 있는 수준의 교회이다. 하느님의 생태학에서는 이 두 가지 교회가 하나로 포함될 수 있다. 하나는 조화를 이루고 있는 교회이며 (극상에 도달함), 다른 하나는 노력하는 교회이다 (극상을 향해 천이 중). 만일 교회가 조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다면 그 집단은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6. 교회와 사회 -- 교회라는 기관교회는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보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음으로써 교회는 기독교와 사회 사이에 공백을 만들고 있다. 결국 교회는 사회의 변화에 느리게 반응하게 된다. 아니면 보수적인 태도를 띠는 것으로 언제나 재빨리 반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또 한편으로 교회는 언제나 듣기보다는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 유일한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리스도가 부여한 임무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가 말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소리가 있으면 그것은 이단이라 못 박는다. 그렇게 못 박음으로써 교회는 사실상 스스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셈이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은 사회도 하느님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교회가 최소한 하느님의 생태계에서 낮은 수준의 교회에 머물러 있다면, 교회는 하느님의 생태학에 귀를 기울이는 동시에 현재 처한 수준에서 얻은 것을 드러내 말해야 한다. 7. 기독교와 그 밖의 종교그럼에도 교회는 다른 종교를 의식하고 있어서,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말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이로써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만유가 어떻게 될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육화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구원이라는 개념도, 기독교도 없을 것이다. 자율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인간뿐이기 때문에, 그 나머지 만유에게는 선악개념이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책임과 함께 자율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자연계시인가 특별계시인가가 아니라 자율과 책임 문제가 된다. 세상의 교회는 아직 낮은 수준의 교회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절반만 있는 진리는 전혀 진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류이다. 그러나 전적인 것은 아니다. 8. 자율과 책임 -- 구원과 심판자율은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선물인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가 인간에게 부여된 것은 '주인'이 되기 위함이며, 이기적인독재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자율과 책임을 따로 떼어 놓으면 하느님의 생태계는 천이를 거쳐 평형에 -- 혼돈이라는 평형에 --이를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내리는 천벌이 (초자연적인 재앙) 아니라 인간이 자초하는 (스스로 택한 천이)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율은 책임과 함께 받아들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러면 생태계는 완전한 형태의 조화가 있는 하느님의 극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어느 경우에든 천이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자율권을 행사하는 데에 따라 진행될 것이다. 예수는 자율권을 행사하고 책임을 지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생태학을 따라 조화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누구든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요 5:24), 이 구원은 극상에 이를 때까지 잠정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극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믿음만큼 잠정적인 것이다. 심판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믿음에 따라 (조화에 다다름 -- 엡 4:13), 혹은 실패에 따라(조화를 완전히 잃어버림 -- 혼돈)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창조가 하느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며, 또한 지금도 하느님의 생태계가 거치는 천이에 따라 창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9. 출생 -- 축복인가 저주인가그럼에도 하느님은 만유에 대해 책임이 있다. 만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하느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만유 내의구성요소 하나하나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인간은 만유 전체의 조화와 또 인간 자체간의 조화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만일 인간이 조화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 실패한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생태계를 파괴한 대가를 치를 것이며 (혼돈), 하느님도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창조가 실패로 돌아감). 흔히 우리는 출생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한다. 실로 출생은 하느님의 창조행위가 가져오는 직접적인 결과이다(혼돈이 조화에 참여함).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조화에 고스란히 참여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는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다. 선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이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부여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자율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생명이라는 선물이 방향을 잡지 못하게 되고 (선물이 저주가 됨), 또는 자율에 대해 책임을 짐으로써 적절히 반성하면 생명이라는 선물이 제대로 방향을 잡게 된다 (선물이 축복이 됨). 혹은 자율권을 행사하여 위험을 전혀 감수하지 않을 수도 (책임을 떠맡지 않음) 있겠다. 아니면 나아가, 하느님의 처벌을 (혼돈) 거부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처벌을 거부하기를 원한다면 책임을 지는 길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10. 과학에너지: 조화는 목적이 있는 에너지이다. 창조된 만유 속에서 만유의 구성원이 어떤 상태로 바뀌든 간에 에너지는 언제나 보존된다. 열역학은 열역학에만 국한했기 때문에 이를 증명하는 데에 실패했다. 신학을 통하면 이를 증명할 수 있다.하느님은 혼돈 속에서 만유를 창조했다. 혼돈은 목적이 없는 에너지이다. 즉 에너지가 완전히 헝클어져 있거나 아니면 에너지끼리 서로 중화된 상태이다. 창조된 만유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목적이 (방향) 있는 에너지가 창조된 만유에 가득했다는 말이다. 조화의 완전도가 떨어지면 에너지의 총량에서 그만한 양의 목적을 잃은 것이다. 즉 만유의 에너지 총합은 현재 시점에서목적이 있는 에너지와 목적이 없는 에너지를 합한 것과 같다. 시간: 하느님의 생태계를 더 깊이 연구하자면 시간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 한 가지로는 시간을 완전한 조화와 현재의 조화수준 사이의 간격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수준의 조화 정도가 현재시간이 된다. 그리고 시간은 조화와 혼돈 사이에서만 정의가 가능하다. 완전한 조화에서부터 (시작점) 혼돈까지만 (끝점) 존재한다. 시간의 끝점은 (종말) 조화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 (구원) 될 수도 있고, 조화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파멸) 될 수도 있다. 현재 우리는 선형적인 체계로 시간을 재고 있다: 과거 - 현재 - 미래. 그러나 위와 같은 새로운 개념의 시간을 나타내자면 새로운 축이 하나 더 필요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시간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조화까지의 거리 및 혼돈까지의 거리이다. 선형적 체계에서는 시간이 오직 미래로 향하여만 움직인다. 그러나 삼차원적인 시간개념에서는 시간을 거슬러가는 일이 가능하다. 시간이라는 공간에 조화라는 평면이 있고, 또 한쪽에는 혼돈이라는 평면이 있다. 그리고 현재는 이 두 평면사이의 어느 한 점에 해당한다. 두 평면 사이에서 우리 위치는 우리가 천이함에 따라 달라진다. 과학과 조화: 과학 발전은 모두 하느님의 생태계 내에서 일어나지만, 꼭 조화를 향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에너지를 다루고 있으며, 인간의 자율에는 에너지 계를 파괴하여 혼돈, 즉 에너지가 목적을 잃는 상태에 이르게 할 가능성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과학 분야에는 만유인력이 잘 알려져 있지만, 과학자와 각국 정부는 우주개발에 힘쓰고 있다.(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지구는 일정한 질량을 지니고 있고, 질량은 우주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일우주선을 우주로 쏘아 보냄으로써 일정량의 질량을 잃는다면, 그 양이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우주의 움직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수백, 수천만 년이 걸린다 해도 잃은 질량은 잃은 것이다. 조화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신학은 소위 종교적이라 하는 영역 내에 스스로 한계를 지을 것이 아니라, 과학의 다른 분야를 모두 포괄하여야 한다. |